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공산주의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루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냉전기 미국이 중국과 손잡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미중은 비밀협상을 통해 양국 관계를 개선한 것이었다.
냉전 초 미국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국을 봉쇄한다. 미국의 생각은 단기적으로는 공산당 정부인 중국을 봉쇄하여 팽창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약한 쪽(중국)을 강하게 눌러 약한 쪽이 강자(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고 강자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다. 즉, 중소 간의 균열을 확대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 후르시쵸프의 소련은 가급적 군비를 줄이고 국내경제를 개혁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미국이 중국을 극단적으로 적대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입장에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미소 간의 긴장이 완화되면, 만일 미국이 중국을 공격했을 때 소련이 도와줄지 의심스럽게 된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의 이익을 희생시킬까 걱정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타이완 위기 시에도 소련은 중국을 강하게 지지하기보다는 마오를 너무 모험적이라 생각하고 지역갈등이 확대되지 않도록 내부적으로 중국을 비난하였다. 후르시쵸프는 중국에 핵무기 개발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마저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중국은 자력으로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소련은 믿을만하지 못했고, 소련의 입장에서 중국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중소 이념분쟁(중국이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 등)은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 소련은 점진적 개혁으로 나아간 반면, 마오의 중국은 내부적으로 굉장히 급진적이었고, 정치적 의지로 생산관계를 바꾸어 경제적인 측면인 생산력을 추동하려했던 대약진 운동은 크게 실패하였다. 마오는 실패를 만회하고자, 자신이 세운 국가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문화대혁명을 벌인다. 자본주의적 요소가 있는 경제정책에 대해 마오의 불만이 있었고 권력만 되찾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급진적인 운동을 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공존을 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적절히 유지하고자한 반면, 중국은 미소가 경쟁을 하면서 소련이 자신에게 강하게 동맹 공약을 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전략적 균열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서서히 정책 변화를 시도했다. 중국과 소련 사이의 틈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고립까지 시키는 것은 불필요하게 강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미국이 봉쇄의 강도를 낮출 때 마오는 주적인 미국과 가까워진다면 소련과의 관계가 더 엉망이 될 것이라 보고 미국의 손길을 거절했었다. 미국을 상대로 중국과 소련은 여전히 잠재적인 동지였었다.
그런데 중소 간 이념갈등이 본격적으로 군사분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수리 강변에서 1969년 중소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또한 중국의 핵개발 이후 소련은 과거와 다른 형태의 계산을 하게 되고 중국을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브레즈네프는 군사적 힘을 통해 상대방을 협박하면서 상대를 누르려고 했지만 중국과 같은 국가를 누르기는 쉽지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지속적으로 군비를 증강하였다. 1970년대가 되면 전세계적으로 미소 간 균형이 형성되었고, 지역적인 권력구도가 변해서 소련이 중국 대륙으로 군사적 전개가 가능해졌고, 실제로 지상군을 전진 배치하였다. 중국은 주적 미국보다 옆의 이웃이 더 두려워지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지도부가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한편, 1969년 닉슨행정부가 들어서서 닉슨독트린을 발표한다. 아시아 스스로가 아시아의 안보에 있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고, 미국의 역할을 줄인다는 것이 요점이다. 지역적인 차원에서 소련이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 반면, 미국은 군사적인 공약을 줄여가는 상황이었다.
1969년 당시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전략적으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념적으로 적대적인 미국에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시아에서 미국은 닉슨독트린 이후로 아시아에서 군사를 축소하고 있는 반면, 소련은 군비 확장을 하고 있었다.
닉슨은 닉슨 독트린으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빠져나오지만 중국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미국은 소련과 데탕트는 추진하지만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활용해서 소련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20년 동안 미중은 적대관계를 펼쳐왔기 때문에 상황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도 “고립시키지 않는 봉쇄”라는 보다 완화된 의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키신져는 미중러 삼각관계에서 미중이 가까워져 전략적 협력을 하면, 소련도 더 미국과 더 친한 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미중이 전략적 협력을 하면 소련이 위험하다고 느껴서 더 미국과 친해지려 할 것이었다. 미국은 이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maneuver)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닉슨은 미중회담을 시작하였다. 협력을 위해서는 공동이익 인식이 중요하다. 닉슨 방문시에 소련의 헤게모니에 대항해 미중 양국이 공동의 이익이 있다고 암묵적으로 말했다. 미국은 중국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한편, 정보교환, 군사기술지원 등 안보 협력을 했고, 천안문 사태 전까지 이러한 미중 관계가 이어졌다.
즉, 중국이 소련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필요했다. 미국은 중국과 손잡고 소련에 대한 균형(balancing)을 취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국은 미국을 보완해줄 수 있었고, 데탕트 과정에서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한 지렛대로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외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냉전 외교사 : 한국전쟁 (0) | 2019.04.02 |
---|---|
냉전 외교사 : 냉전 초기 미중관계 ③ (0) | 2019.04.02 |
냉전 외교사 : 냉전 초기 미중관계 ② (0) | 2019.04.02 |
냉전 외교사 : 냉전 초기 미중관계 ① (0) | 2019.04.02 |
냉전 외교사 : 미국의 봉쇄정책(Containment) (0) | 2019.04.02 |